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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대가의 예술세계를 한자리에서 만나다!

봄날, 대가의 예술세계를 한자리에서 만나다

대전 이응노미술관



3월이 가기 전에 단 하나의 전시를 관람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응노미술관의 첫 기증 작품전(2/8~3/31)일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거목, 그러나 예술 외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외국에서 더 많이 알려지고 인정받았던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의 작품 533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지난해 12월에 추가로 기증받아 현재 연구 및 정리 중인 작품 664점을 제외하고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기증받은 작품 전체가 이번 전시에서 일반에게 선을 보인다. 서예, 회화, 도자, 조각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던 고암의 예술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앵이 설계한 이응노미술관 외관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앵이 설계한 이응노미술관


1904년에 태어나 1989년 작고할 때까지 85년간 남긴 작품 수가 무려 3만여 점. 85년을 일수로 환산하면 얼추 3만 1,000여 일이 되니 과연 무섭고도 초인적인 창작열이다. 그럼에도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점이 놀랍다. 하여 3만 점 중 533점은 숫자로 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 모르나 내용적으로는 대단히 풍성하고 다양하다. 가장 많이 알려진 <군상> 이나 <문자추상> 외에 1980년도에 제작된 화려한 원색의 도자기 디자인 도안에서는 이런 작업도 했나 싶은 의외성과 자유분방한 예술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프랑스 고블랭 국립 태피스트리 제작소가 1970년대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구입해 태피스트리로 제작한 작품 <밤나무>는 그대로 가져다가 거실에 걸어두고 싶을 만큼 세련됐다.



"나의 창작생활은 50여 년을 통하여 똑같은 수법의 되풀이를 싫어하며, 항상 자신이 하던 일을 깨트리는 습성이 연이은 불만으로 현재도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으리라 여겨진다." ―고암 이응노

전시 팸플릿 전시장 입구

[왼쪽/오른쪽]전시 팸플릿 / 전시장 입구 전시장 내부 2009년 태피스트리로 제작된 작품 <밤나무>

[왼쪽/오른쪽]전시장 내부 / 2009년 태피스트리로 제작된 작품 <밤나무>. 원작은 1972년


고암 이응노 하면 아마도 <군상>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흰 종이에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둘, 셋 또는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걷듯, 뛰듯, 춤추듯 역동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멀리서 보면 점으로도 보이고 새떼처럼도 보이는 이 그림들은 고암이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즉 1980년대에 10여 년간 몰두한 작품들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노화가의 예술관이 투영된 이 작품들은 작가가 걸어온 인생 역정과 역사를 알고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구한말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고, 1958년 나이 쉰다섯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활동했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인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1977년에는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 사건에 연루돼 국내 입국이 불허되었으며, 결국 그리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1989년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호암미술관에서 자신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던 해였다.


이응노미술관 로비 로비 벽면 윗부분을 장식한 <군상>

[왼쪽/오른쪽]이응노미술관 로비 / 로비 벽면 윗부분을 장식한 <군상>


고암이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로부터 초청을 받고 파리로 건너간 것은 1958년, 그의 나이 쉰다섯 살 때였다. 홍익대 미술대학 주임교수를 지내는 등 예술가로서 안정기에 접어든 때에 과감히 도불을 감행하게 한 것은 우리의 미술, 동양의 정신을 세계 속에서 한번 겨루어보고 싶다는 열정이었다. 유럽 화단에서 고암의 작품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잭슨 폴록과 살바도르 달리 등을 발탁하고 지원했던 프랑스 파게티 화랑과 1960년 전속계약을 맺고 파리를 비롯해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문자의 형태와 획들을 재구성한 <구성Composition> 시리즈를 제작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문자추상'이라 부르는 작품들이다. 문자이지만 그림이고, 그림이면서 문자이기도 한 이 작품들은 추상화가 어렵다는 선입견과 달리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한눈에 반하고 마는 매력을 지녔다. 고암이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사군자부'에 입선하며 서화가로서 미술계에 입문했음을 상기하면, 동양화의 사의(寫意) 정신과 서예의 필획이 고암 예술의 근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0~1970년대 <구성> 연작 괘 이름 획 하나하나를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한 <주역 시리즈>

[왼쪽/오른쪽]1960~1970년대 <구성> 연작 / 괘 이름 획 하나하나를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한 <주역 시리즈>



"예술은 자신의 뿌리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나는 충남 홍성 사람입니다." ―고암 이응노, 1988

전시를 본 후 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충남 홍성을 연계해 여행하면 좋다. 열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 그 뒤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지만, 고향 홍성은 고암에게 평생 그리움의 대상이자 예술혼의 뿌리였다. 고암의 유해는 파리 시립 페르 라 셰즈 묘지에 잠들어 있어 쉬 찾아가기 어렵다. 하지만 홍성은 대전에서 지척인 데다 2011년에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이 있어 고암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지로 맞춤하다. 기념관은 선유도공원과 광주 의재미술관, 서울올림픽공원 소마(SOMA)미술관 등을 만든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했다. 주변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지은, 소박하지만 무척 인상적인 박스형 건물이다. 고암의 유품을 비롯해 <고향집>, <어머니>, <산수>등 다양한 스케치도 만날 수 있으며, 4월 7일까지 특별 기획전 '홍성, 답다'가 열릴 예정이다.
홍성 인근의 예산 수덕사도 고암이 즐겨 찾으며 글과 그림으로 여러 차례 남겼던 의미 있는 장소다. 수덕사 입구의 수덕여관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고암이 직접 사들여 작업실로 사용했고, 동백림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후 몸을 추슬렀던 곳이다. 이때 수덕여관 앞 너럭바위에 남긴 암각화는 고암의 주요 작품 중 하나다.


홍성 이응노 생가 기념관 내부 홍성 이응노 생가 기념관 내부

홍성 이응노 생가 기념관


<이응노미술관>
주소 : 대전 서구 만년동 396(둔산대로 157)
문의 : 042-611-9800
홈페이지 : ungnolee.daejeon.go.kr



여행정보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경부고속도로 회덕분기점 → 호남고속도로 → 북대전IC → 대전정부청사 방면 → 대덕대교 지나 만년사거리에서 좌회전 → 평송청소년수련원 앞에서 유턴 → 이응노미술관

* 대중교통

서울→대전 : 동서울터미널에서 대전정부청사까지 1일 48회(06:10~21:30) 운행, 2시간 소요. 대전청사에서 미술관까지 도보 15분 또는 택시 5분 거리

2.맛집

서가앤쿡 : 둔산2동 / 스테이크, 바비큐 / 042-489-5546
올리브힐 : 둔산2동 / 파스타, 샐러드 / 042-486-1831
대선칼국수 : 둔산1동 / 칼국수, 만두, 수제비 / 042-471-0316

3.숙소

토요코인호텔 : 둔산동 / 042-545-1045 / www.toyoko-inn.kr
삼호자객관 : 둔산동 / 042-487-5995 / www.042-487-5995.kti114.net / 굿스테이
조이호텔 : 월평동 / 042-485-3030 / www.hoteljoy.kr